압생트
초록 요정과 100년의 오해
약국에서 태어난 술
1792년, 스위스 쿠베(Couvet) 마을의 의사 피에르 오르디네르(Pierre Ordinaire)는 약초를 증류해 만든 약용 음료를 처방하기 시작합니다. 주재료는 쑥(wormwood, Artemisia absinthium), 아니스(anise), 펜넬(fennel)이었습니다. 쑥은 고대부터 소화 촉진, 발열 완화, 기생충 구제에 쓰이던 약초였고, 아니스와 펜넬은 쑥의 쓴맛을 중화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음료는 증류 과정에서 클로로필 성분이 녹아 들어가 선명한 초록색을 띠었습니다. 환자들은 이것을 "라 페 베르트(La Fée Verte, 초록 요정)"라고 불렀습니다.
오르디네르가 레시피를 앙리-루이 페르노(Henri-Louis Pernod)에게 팔면서 압생트는 상업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합니다. 1800년대 중반, 알제리 식민지를 다녀온 프랑스 군인들이 압생트를 본국으로 가져오면서 파리에 압생트 붐이 일기 시작합니다. 군대에서는 말라리아 예방 목적으로 압생트를 지급했는데, 병사들이 이 맛에 중독돼 고향에 돌아와서도 계속 마신 것입니다. 1860~1890년대 파리에서는 오후 5시가 되면 카페마다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들로 넘쳤고, 이 시간을 "라뢰르 베르트(L'heure verte, 초록 시간)"라고 불렀습니다.
예술가들의 술 — 반 고흐, 로트레크, 랭보
압생트는 19세기 말 파리 예술계의 공식 음료였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에드가 드가(Edgar Degas),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 폴 고갱(Paul Gauguin), 시인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와 폴 베를렌(Paul Verlaine)이 모두 압생트의 열렬한 애호가였습니다. 피카소의 유명한 그림 '압생트를 마시는 여인(The Absinthe Drinker)'도 이 시대 파리 카페 문화를 담고 있습니다.
반 고흐에 관해서는 특별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후기 작품에서 색채가 극단적으로 강렬해지고 노란색이 과도하게 강조되는 것이 압생트 속 '투존(thujone)' 성분 때문에 시각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반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른 사건도 압생트 중독과 연관 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의학 연구는 반 고흐의 정신 질환이 주로 간질(epilepsy)과 납 중독, 그리고 디지탈리스(digitalis) 과다 복용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으며, 압생트만의 단일 원인은 아닌 것으로 결론 내립니다. 어쨌든 압생트는 그 시대 창조적 광기의 상징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압생트 철학
"압생트의 첫 모금 이후에는 사물이 있는 그대로 보인다. 두 번째 모금 이후에는 없는 것들이 보인다. 마지막으로, 사물들은 진짜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는 압생트에 관한 가장 유명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물론 이것은 압생트의 환각 효과를 직접 묘사한 것이 아니라, 와일드 특유의 역설적 위트로 취함의 단계를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압생트를 둘러싼 신비로운 이미지를 극적으로 강화했습니다. 실제로 와일드는 압생트를 즐겨 마셨고, 런던 호텔 오막(Savoy Hotel)에서 압생트를 손에 들고 살롱을 드나들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랑프레이 사건 — 조작된 공포
압생트의 몰락은 1905년 스위스에서 시작됩니다. 장 랑프레이(Jean Lanfray)라는 남자가 아내와 두 딸을 살해합니다. 언론은 즉시 "압생트 광기(absinthe madness)"를 범행 원인으로 지목했고, 이 사건은 전 유럽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금주 운동 단체들은 이 사건을 이용해 압생트 금지 청원에 수십만 명의 서명을 받습니다. 그 결과 스위스, 프랑스, 미국 등이 잇따라 압생트를 금지합니다.
그런데 실제 재판 기록을 보면 랑프레이가 그날 마신 술의 목록이 충격적입니다. 아침에 코냑 2잔, 정오에 코냑 1잔, 점심에 와인 7잔, 오후에 코냑 1잔, 저녁에 다시 코냑과 와인을 더 마셨고, 그 사이에 압생트를 2잔 마셨습니다. 사망자가 나온 진짜 원인은 코냑과 와인으로 인한 극심한 알코올 중독이었습니다. 압생트 2잔은 수십 잔의 다른 술에 비하면 미미한 양이었습니다. 하지만 언론은 압생트만 부각시켰고, 공중 보건 캠페인과 와인 업계(압생트가 시장을 잠식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압생트는 악마의 음료로 낙인찍혔습니다.
투존의 신화 — 과학이 풀어낸 100년의 오해
압생트가 일반 알코올과 다른 환각 효과를 가진다는 주장은 쑥에 들어 있는 '투존(thujone)'이라는 성분 때문이었습니다. 투존은 신경 계통에 작용하는 물질이 맞습니다. 문제는 실제 압생트 한 잔에 들어 있는 투존의 양입니다. 현대 과학자들이 19세기 실제 압생트 제품들을 분석한 결과, 투존 함량은 음료 1리터당 수십 밀리그램에 불과했습니다. 이 양은 투존이 신경계에 영향을 주는 용량에 훨씬 못 미칩니다. 압생트를 마시고 느끼는 '특별한 느낌'은 투존이 아니라 단순히 높은 알코올 도수(45~75%) 때문이었습니다.
1990년대 유럽에서 이 사실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면서 압생트는 EU에서 다시 합법화됩니다. 미국에서는 2007년부터 제한적으로 허용됩니다. 100년 동안 금지된 술이 사실은 평범한 고도주였다는 것입니다. 역사상 가장 거대한 술에 관한 오해였습니다.
압생트 의식 — 스푼, 설탕, 물의 예술
압생트를 마시는 방식은 하나의 의식입니다. 먼저 넓은 잔에 압생트를 30~40ml 붓습니다. 잔 위에 구멍이 뚫린 압생트 전용 은색 스푼(absinthe spoon)을 얹고, 스푼 위에 각설탕을 올립니다. 그 위에 차가운 물을 천천히, 실처럼 가늘게 붓습니다. 물이 설탕을 녹이며 압생트에 스며드는 순간, 투명한 초록빛 술이 뿌옇게 변합니다. 이것을 '루셰(louche, 뿌옇게 흐려짐)'라고 합니다. 아니스와 펜넬의 기름 성분이 물을 만나 에멀전을 형성하는 화학 반응입니다. 이 변화를 보는 것 자체가 압생트 음용 문화의 핵심입니다.
물 대 압생트의 비율은 3:1에서 5:1 정도가 일반적입니다. 물을 많이 넣을수록 향은 부드러워지고 알코올 강도는 줄어듭니다. 완성된 압생트는 아니스 특유의 달콤하면서도 허브스러운 향, 그리고 쑥의 은은한 쓴맛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집니다. 한 모금 마시면 서늘하고 청량한 느낌이 입 안에 퍼집니다.
🍽 페어링 추천
압생트의 아니스와 펜넬 향은 지중해 허브 요리와 자연스럽게 어울립니다. 그린 올리브나 올리브 오일을 곁들인 빵은 향의 공명으로 훌륭한 페어링입니다. 아니스 씨앗이 들어간 치즈나 허브 치즈도 잘 맞습니다. 굴과 조개 등 해산물은 압생트의 청량감을 극대화합니다. 디저트로는 아니스 쿠키, 팔각(스타 아니스)이 들어간 과자류와 함께하면 향의 통일감을 즐길 수 있습니다. 요즘은 압생트를 진저에일이나 토닉워터와 섞는 롱드링크 형태로 즐기는 것도 인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