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 와인
아르헨티나·칠레가 유럽을 넘어선 날
신세계 와인이란
와인 세계는 크게 구세계(Old World)와 신세계(New World)로 나뉩니다. 구세계는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등 와인의 전통이 수백 년 이상인 유럽 국가들입니다. 신세계는 미국, 호주, 뉴질랜드, 아르헨티나, 칠레,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유럽 이외 지역입니다. 신세계 와인은 오랫동안 '유럽의 아류'로 취급받았습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신세계는 빠르게 품질을 높이며 국제 무대에서 구세계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때로는 넘어섰습니다.
아르헨티나 — 말벡의 고향
아르헨티나 하면 탱고, 축구, 그리고 말벡(Malbec)입니다. 말벡은 원래 프랑스 남서부의 카오르(Cahors) 지방 품종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보르도 블렌딩에 소량 사용되는 부품종으로 취급됐고, 19세기 포도 전염병(필록세라)이 유럽을 휩쓸면서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아르헨티나로 넘어간 말벡은 완전히 다른 품종이 됩니다.
아르헨티나의 멘도사(Mendoza) 지역은 안데스 산맥 기슭, 해발 900~1,500미터에 위치한 고산 지대입니다. 일교차가 크고 햇빛이 강렬하며 건조합니다. 이 환경에서 말벡은 프랑스에서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랐습니다. 껍질이 두꺼워지고 색이 짙어졌으며, 자두·블루베리·초콜릿의 풍부한 과실 향에 부드러운 타닌이 더해졌습니다. 프랑스 말벡이 시골 사람처럼 거칠었다면, 아르헨티나 말벡은 세련된 도시인처럼 변신했습니다.
2000년대 이후 아르헨티나 말벡은 전 세계 소믈리에와 일반 소비자를 모두 사로잡으며 세계 최고의 말벡 생산국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카테나 사파타(Catena Zapata), 아차발 페레르(Achaval Ferrer), 추이(Zuccardi) 같은 생산자들은 국제 평가에서 프랑스 최고급 와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합니다.
칠레 — 사라진 품종 카르메네르의 귀환
칠레 와인에는 기적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1994년, 칠레의 포도밭에서 유전자 검사를 하던 연구진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칠레 전역에서 메를로(Merlot)라고 불려오던 포도가 사실은 메를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실제 품종은 카르메네르(Carménère) —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필록세라로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고대 보르도 품종이었습니다.
19세기 초 프랑스 이민자들이 칠레로 가져온 카르메네르가 유럽에서는 사라진 채 칠레의 포도밭에서 150년간 메를로로 오인되며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유럽에서 잃어버린 품종을 남미에서 되찾은 이 발견은 와인 세계에 엄청난 화제가 됐습니다. 칠레는 즉시 카르메네르를 국가 대표 품종으로 채택했습니다. 카르메네르는 초록 피망, 붉은 과실, 부드러운 타닌이 어우러진 독특한 스타일로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칠레는 카르메네르 외에도 카베르네 소비뇽, 시라, 소비뇽 블랑에서 탁월한 품질을 보입니다. 특히 카사블랑카 밸리(Casablanca Valley)와 산안토니오(San Antonio)의 서늘한 기후에서 만드는 소비뇽 블랑과 피노 누아르는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신세계 vs 구세계 — 철학의 차이
신세계 와인은 구세계와 접근 방식 자체가 다릅니다. 구세계는 지역과 테루아르를 강조합니다. 레이블에 포도 품종 대신 산지 이름(보르도, 부르고뉴, 키안티)을 표기합니다. 신세계는 포도 품종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레이블에 "Malbec", "Cabernet Sauvignon"처럼 품종 이름이 크게 적혀 있어 소비자가 와인을 선택하기 훨씬 쉽습니다. 이 접근 방식이 신세계 와인의 폭발적인 대중화를 이끌었습니다.
또 신세계 와인은 과실 풍미가 풍부하고 알코올이 높은 경향이 있습니다. 구세계 와인이 미네랄과 흙, 산도를 강조하는 절제된 스타일이라면, 신세계는 풍부하고 직관적인 과실미로 처음 마시는 사람도 쉽게 즐길 수 있습니다.
호주 — 쉬라즈의 제국
신세계 와인 강국 중 호주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호주는 론 계곡의 시라(Syrah)를 쉬라즈(Shiraz)라는 이름으로 자국화하여 세계 최고의 쉬라즈 생산국이 됐습니다. 남호주의 바로사 밸리(Barossa Valley)에서 만드는 펜폴즈 그란지(Penfolds Grange)는 호주 와인의 아이콘으로, 국제 평가에서 최고 등급을 받는 와인 중 하나입니다.
유럽에서 사라진 포도가 안데스 산맥 저편에서 다시 태어났습니다. 와인은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씁니다.
🍽 페어링 추천
아르헨티나 말벡은 아사도(Asado, 아르헨티나식 바비큐)와 천생연분입니다. 한식으로는 삼겹살 숯불구이, 소갈비구이와 완벽하게 어울립니다. 칠레 카르메네르는 피망과 허브의 향이 있어 된장·고추장 베이스 요리와 의외로 잘 맞습니다. 칠레 소비뇽 블랑은 회, 굴, 해물파전과 훌륭한 페어링을 이룹니다.